(빙하 아래를 들여다보는 일) HR컨설팅은 마치 다른 행성을 탐사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끔합니다. 인하우스에서 나와 컨설팅을 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다양한 조직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실적, 서비스, 핵심가치처럼 눈에 띄는 것들은 사실 표면에 불과합니다. 그 아래에는 제도, 문화, 리더십, 일하는 방식처럼 조직의 진짜 모습이 숨겨져 있습니다. 공공조직도 예외는 아닙니다. 특히 공직사회의 경우, 겉으로는 안정적이고 규범적인 시스템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모순과 비효율이 빙하처럼 고요히 감춰져 있습니다.

책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은 누구나 쉽게 말하지만, 제대로 직시해보지 않았던 이 빙하 아래를 정면으로 들여다봅니다. 저자인 노한동 작가는 공직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집요하게 짚어내며, 우리 사회가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가짜노동’의 문제를 직시하게 만듭니다.

(공무원의 문제만이 아닌, 더 보편적인 위기)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공무원만 겪는 문제는 아니지 않나?”였습니다. 실제로 공직사회에서 드러난 문제들은 많은 민간조직에서도 나타납니다. 과중한 보고, 불명확한 책임, 눈치 보는 일 처리 방식. 다 익숙한 풍경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문제를 공직사회만의 일로 축소해 받아들이기 쉬운데, 사실 그게 더 큰 문제입니다.

‘원래 다 그런 거야’라는 인식이 문제를 보편화시키고, 변화를 방해합니다. 이 책의 강점은,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던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꺼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고서 1장의 착시와 ‘평탄화’의 진실)

“세상엔 1장짜리 보고서로 모두 담을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하다. 문제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거나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으며, 해결 방안 역시 많은 논의가 필요한 사안들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정부 보고서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도 ‘핵심만 간단하게’라는 원칙에 경도된다. 보고서 1장에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담길 수 있도록 문제점과 원인, 해결 방안을 2~3가지의 맥락으로 포섭하고, 서로 조응되게 구성하여 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타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현실의 이해관계는 몇 가지의 단순한 맥락으로, 의도적으로 치환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 구절을 하나 꼽으라면 이 구절입니다. 공직사회를 상징하는 일하는 방식 중 하나는 ‘개조식 보고서’입니다. 행정에서 다루는 문제는 대개 복잡합니다. 원인도 복합적이고, 이해관계자도 많으며, 해법은 단순히 정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고는 언제나 ‘간단 명료’해야 한다는 논리로 평탄화됩니다. 현실은 30겹 실타래인데, 보고서는 2겹으로 요약됩니다. 이 평탄화의 결과, 문제는 단순화되고, 맥락은 제거되며, 책임은 분산됩니다.

이건 공직사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조직에서 보고와 결재 중심의 문화가 일하는 방식을 결정합니다. 문제 해결보다 보고서를 잘 쓰는 사람이 인정받는 구조입니다. 이런 조직에서는 새로운 시도나 실험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아마존의 ‘6-pager’를 대안으로 참고할 만합니다. 파워포인트 대신 내러티브 문서를 읽고 회의를 시작하는 방식은 ‘맥락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맥락을 지운 보고 문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힌트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 안 하는 공무원’이라는 프레임의 이면) 이번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심판결정문에서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현상을 MZ세대 공무원의 높은 자율성 때문이라고 해석하지만, 저는 다르게 봅니다. 이미 블랙리스트 사태, 행정권 남용 등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공직사회는 학습을 해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의도된 태업’이 있었고 그 위에 ‘신중한 저항’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왜 그들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가?’입니다. 공직자 개인의 역량이나 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한과 책임의 구조적 불일치입니다. 그들이 가진 권한보다 더 큰 책임을 요구받는 구조에서는, 소극적 태도만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됩니다. 이는 결국 공직사회의 ‘직무 오너십’을 갉아먹게 됩니다.

(권한과 책임, 그리고 일의 오너십)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공직사회의 문제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본질을 ‘직무오너십’으로 정확히 짚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과거 발전국가 시절, 관료는 사회 의제를 설정하고 정책을 주도했지만 민주화 이후, 정치권이 의제를 주도하고 관료는 실행자로 바뀌었다고 진단합니다. 일명 주피터 형에서 헤라클레스 형으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죠. 이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문제는 거버넌스의 무게가 커지면서 실무자의 권한은 줄고 책임은 늘어났다고 주장합니다.

정치는 시민의 삶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행정은 실행 과정에서 생기는 복잡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즉 정치는 방향을 잡고, 행정은 실행에 집중해야 합니다. 연금개혁, 노동개혁, 젠더갈등처럼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루는 문제들일수록 정치가 더욱 정공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기업에 비유하자면, 정치는 비전과 전략을 책임지고, 행정은 실행과 개선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여전히 품의와 결재 중심으로 작동하는 행정 시스템은 이제 혁신이 필요합니다. (‘충주맨’의 성공이 ‘결재 없는 업로드’ 덕분이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정치와 행정 간의 역할 재정립, 시민의 참여 방식, 거버넌스 설계 전반에 걸친 담론이 필요하지만 공무원의 인사제도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도 필요해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2025년 인사혁신처가 내놓은 ‘2027년 9급 초임 보수 300만원 보장’과 ‘5급 선발승진제 도입’도 다소 아쉬운 대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자리로서의 공직의 매력을 높일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들어와서 실망하는 구조’는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진제도의 변화역시 연공 중심의 인사관리 운영을 일부 개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고성과창출에 대한 지향이 아닌 보상으로서의 승진에 목을 매는 문화를 더욱 가속화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제도의 신설이 아닌 기존 구조에 어떤 철학을 입힐 것인가 입니다. 공직사회는 상사가 아닌 시민을 진정한 고객으로 바라보고, 보상에 얽매인 문화를 벗어나 ‘자율과 책임’을 회복할 때 비로소 진짜 혁신이 시작됩니다.

(공직사회의 혁신은 결국 오너십 회복에서) 공직사회의 일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순한 제도 개선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직 내에 축적된 관성,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 책임을 회피하는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한 걸음이라도 더 나가려면, 문제의 원인을 명료하게 파악하여 적확한 대안을 고민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이 현실에서 가능한 방법인지를 끊임없이 고려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계급제나 연공서열 같은 공직사회의 근본을 일거에 바꾸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급진적 변혁은 자주 예상치 못한 부작용으로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어느 정도는 관료의 선의와 책임감을 믿고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향의 대안이 필요하다. 결국 공직사회의 개혁은 현실에서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남길지를 끝없이 고민하는 과정이다.”

저자의 말처럼 마법 같은 한방은 없습니다. 오너십을 회복하려는 꾸준한 회고와 개선이야말로, 120만명에 육박하는 공무원들이 ‘나라를 위해 일다운 일’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